육일각/죽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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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일각 비(六一閣 碑)


소  재  지 : 경상남도 거제시 연초면 죽토리 죽천사 경내

건립연도 : 1994년 10월

배향인물 : 별시위공파 후손


육일각과 죽천사 전경
육일각과 죽천사 전경


선조묘소가 실전된 별시위공파의 파조이신 별시위공 휘 호(浩/8세)의 후손 6위가 모셔져 있다.

- 장남 어모장군(禦侮將軍 동천공 휘 계충(東泉公 諱 繼忠/9세)

- 차남 통정대부 동곡공 휘 계은(通政大夫 東谷公 諱 繼恩/9세)

- 장손 통덕랑 석계공 휘 세필(通德朗 石溪公 諱 世弼/10세)

- 차손 통정대부 동계공 휘 세걸(通政大夫 東溪公 諱 世傑/10세)

- 선교랑 서계공 휘 세억(宣敎朗 西溪公 諱 世億/10세)

- 장 증손 진사 일제공 휘 검(進仕 一齊公 諱 儉/11세)



죽천공 묘비문

(譯 동아대 박물관장 松泉심봉근 박사)

公의 諱는 信卞이요 字는 誠現이며 號가 竹泉으로 宜寧人이다

일부 略함 考의(父) 諱는 儉인데 모두 早世(일찍 돌아가심), ?는 晉陽河氏로서 가칭 丙寅(1566)에 公을 낳으셨다. 태어남에 총민함으로 

남명 曺植선생께서 이를 보시고 奇異하게 여기시며 말씀 하시기를 ‘이 아이 훗날 반드시 異器를 이룰 것이다’라고 하셨다. 長成함에 學識

이 通博하고 志節이 磊落(뢰락)하셨다. 27세에 임진왜란을 당하여 적중에 빠지게 됨에 敵이 칼로 威脅하며 항복하라고 하나 公께서는 적

을 꾸짖으시며 精神과 顔色에 시종 변함이 없으셨다. 적이 그 義를 壯하게 여기고 차마 害하지 못하고 묶어 倭主에게 보냄에 倭主가 보고 

이를 恭敬해 손님맞이 禮로써 待遇하고 베풀어주며 獄官으로 다스리도록 하였으나 公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朝鮮人인데 異國의 官爵

(관작=벼슬)을 받는 다는 것은 不當하다‘고 하시며 義로써 항거하며 따르지 아니하자 이에 海賓으로 옮겨 安置시켰다.

前後 7년간 難險을 두루 맛보았으나 꼿꼿함이 蘇子卿과 더불어 世上은 다를지라도 꼭 符合된다고 할 것이다. 詩에 가로되, 영웅도 무를 

쓸 수가 없구나 몸이 왜적의 손아귀에 빠졌도다. 義氣는 하늘을 찌르고 나라위한 붉은 마음은 붉게 탄다. 어찌 衛律과 같이 항복하리요 

子卿의 忠誠을 생각하노라 칼을 치며 긴 시름하여도 도도한 한은 다 할 줄이 없네. 차라리 故國에 돌아가 죽을지언정 오랑케 땅에서 살지

 않으리라 토하는 기운은 무지개발 같이 뻗치고 어버이를 생각하면 눈물이 앞선다

倭에 그래도 의로움을 좋아하는 者가 있어 몰래 작은 배에 태우고서 한곳에 돌아와 닿으니 이에 거제의 玉浦鎭이라 죽토와 거리가 10里

인데 죽토는 侍郞公이 藏修한 곳으로 이어 그곳에서 취거하니 府伯이 공의 風儀를 듣고 本鎭을 지키게 함에 남은 적을 거의 다 剿捕(초포)

하셨다. 또 이어 校長이 됨에 孝悌를 勤?하고써 禮儀를 펴시니 멀리서 비로소 學問하는 곳이 알게 되었다. 府伯이 朝廷에 傳達함에 樂 正

을 增殖하고 효종 임금 때 또 호조참의에 贈職되셨다. 향년 91세로 죽토에서 돌아가심에 송정 장좌동의 子坐之原에 장사지냈는데 숙종

임금 乙未(1715)에 성균관과 四學의 儒學者와 道內의 儒生들이 힘을 합쳐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죽천사에 祭享케 하였다. 숙부인 諸氏는

 本籍이 漆原으로 부장인국의 따님이시며 중장 公 諱 洙의 三從姪女로 심이 婦德이 있으셨는데 묘는 남편과 合葬하였다.

配淑夫人김해김씨는 呂秀의 따님이라 묘는 公의 묘의 右側에 附葬되어 있다. 公이 3男1女 낳으시니 장남은 宣敎郞으로 이조참판에 贈職

된 振成이며 차남과 3남은 大成,又成이며 따님은 潘斗星에게 出家하였다


公 : 1566~1656卒 漆原 尹 炳 五 謹書

諸氏 : 1588~1636卒

金씨 : 1594~1641卒 監役?竹 泉墓詞 重建委員會 舊碑墓下埋立



죽천사 시향봉행


12세죽천공玉 信卞
1566~1656 (4월 한식일 묘제)
15세해월당玉 武獻
1652~1726
15세양    정玉 三獻
1654~1763
15세죽    계玉 瓚獻
1694~1756
20세경    암玉 大鏞
1813~1867



玉 信卞의 아들 옥진성은 이조참판을 지냈고 손자 命圭는 숙종조에 우암 송시열의 문하생인 金鎭圭문하에 들어 주자학을 이어받았으며 

명규의 아들 三獻은 盤谷서원을 세우고 송시열의 영정을 모셔와 배향했다. 그 후 삼헌 무헌 찬헌 동형제와 현손 대용은 벼슬을 멀리 하고 

송시열의 학문적 혈통을 이어받아 주자학을 재정립하는데 일생을 받친 높은 뜻을 기리고자 향내 士林들은 이들을 玉門四賢으로 받들어 

거제 竹泉祠에 배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