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옥씨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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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씨의 시조 휘(諱/돌아가신 분의 이름 앞에 붙임) 진서(眞瑞)는 당나라 사람으로 서기 635년(唐貞觀9年乙未)  또는 서기 643년(고구려 28대 보장왕2년) 으로 지금으로부터 1,380여 년 전에 고구려의 유생들을 가르칠 교수의 임무를 띠고 정관팔학사의 재사(才士)중 한 분이시다.

그 후 고구려가 패망하자 신라 조에서 벼슬하여 서기 670년(신라 문무왕 10년)까지 35년 동안 고구려와 신라에서 시서예악(詩: 시문/문장, 書: 글씨, 禮: 예절 즉 사람의 도리, 樂: 가사 와 악곡)의 학문과 군충(君忠: 임금을 섬기고 나라에 충성함) 수기(修己:자신을 갈고 닦음) 치인(治人/사람을 이끌어 다스림)의 바른 길을 가르쳐 그 덕망이 널리 알려지게 되자 신라조정에서 그 공을 가상히 여겨 의춘군(宜春君)에 봉작(封爵/작위를 내림)하여 지금의 의령땅(의춘은 의령의 옛 지명)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돌아가신 후에는 조정에서 문혜공(文惠公)의 시호(諡號: 고관, 충신, 공신이 돌아가신 뒤 그의 생전의 행적을 헤아려 임금이 내리는 칭호)를 내리시니 이 분이 의령 옥씨의 관향(貫鄕/본)을 얻은 시조(始祖)이시다.

이로써 후손들은 지금의 의령을 본관(본)으로 삼고 대를 이어 오면서 영남을 중심으로 살다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종족이 번성해짐과 동시에 전란(戰亂)과 정란(政亂) 등으로 전국으로 퍼져 살게 되었다.


이렇게 시조 문혜공 옥 진서께서 이 땅에 오신지 1380여 년이 되었으나 수십 차례에 걸친 전쟁과 재난으로 대를 이어 물려 내려오던 조상들의 문헌과 사적, 보첩(문중의 족보)등이 분실되어 시조 이후의 자세한 내력을 기록으로 밝힐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오래 전에는 문자가 모든 백성에게 일반화되지 않아 선조들이 누구나 기록을 남길 수 없었던 것 또한 원인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다가 1804년 고려시대 진성감무(珍城 監務: 진성은 지금의 진주지역, 감무는 고려 말 현령을 둘 수 없는 현에 두었던 우두머리 벼슬)의 벼슬을 지낸 휘 사미(諱. 斯美. 7세손. 1355년생)의 김해 호적이 발견되었으며, 그 호적의 기록에 휘 사미의 선대 6대조로 고려 신종 7년(1204년)에 창정(倉正: 고려시대관직으로 부호장과 같은 벼슬. 9등급으로 나누어지는 관직에서 셋째등급)의 벼슬을 지낸 휘 은종(恩宗 : 1171년생, 고려 19대 명종 1년)까지 확인 되므로 휘 은종을 기 세조(起世祖: 중시조 즉1세)로 하여 옥씨의 세보(世譜: 세대와 계보)가 세워진 것이다.


그러므로 휘 은종은 중시조(中始祖)가 되는 것이며, 서기 635년(643년) 고구려에 오신 시조 의춘군 휘 진서이후부터 중시조 휘 은종이 출생한 서기 1171년까지 536년(528년)간의 공백을 밝힐만한 문헌과 보첩 등을 찾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에 대한 탐구와 연구는 계속 될 것이다.

분명히 밝혀두는 것은 한반도에 거세하는 모든 옥씨의 본관은 의령(宜寧단본(본이 하나 뿐인 씨족)이라는 것이다.

뿌리를 깊이 알지 못하는 일부 종친들이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본관(개성, 거제, 밀양, 반성, 사천, 선영, 의성, 진주, 창녕 등)으로 밝히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은 매우 당혹스러운 일이다.


이상으로 우리 종족의 기원에 대한 개략을 밝히면서 더욱 다양하고 상세한 것은 2015년에 발간된 「의령 옥씨 천오백 년사」에 옥씨에 관련된 모든 것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2019년 기해년 11월 15일

의령옥씨 대종회 회장(공학박사) 옥 치 남